top of page

웨이트 덱을 추천하는 이유

2005년에 신비주의를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필수 준비물 중 하나였던 타로를 구입하려고 인터넷 쇼핑을 할 때 제가 사고 싶었던 덱은 <켈틱 드래곤 타로 덱>이었습니다. 학문적 식견이 생긴 지금이야 별로 완성도가 높지 않은 덱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당시만 해도 이왕이면 '멋있는 카드'를 갖고 싶은 마음이 큰 소년이었습니다. 커뮤니티에서 초보자에게 추천하는 1순위 타로 덱은 당연히 유니버셜 웨이트였지만, 그림이 취향에 맞지 않아서 멋들어진 그림을 찾아 다녔습니다. 타로를 하는 사람이라면 다들 한 번쯤은 겪는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웬만큼 배웠으면 다른 덱으로 눈을 돌릴 법도 하건만, 2022년인 오늘날까지도 저는 실제 사용 목적으로 쓰는 덱이 웨이트 하나뿐입니다. 가끔 칼럼을 쓸 때에 예시로 사용하는 <좀비 타로>는 과거 좀비 영화를 보면서 쌓은 식견으로 연구와 해설만 했고, 시커를 상대로는 사용해본 일이 거의 없습니다. 인터넷 타로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다 보면 각종 타로 덱을 콜렉션처럼 수집하는 분들이 많이 보이는데 저는 그조차도 시들한 편입니다. 사용하지도 않을 덱을 갖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경우가 많지 않은 까닭입니다. 오늘은 제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 웨이트 덱, 무엇이 그리 대단한가?



사실 첫 뎃으로 웨이트 덱을 추천하는 데에는 합리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소위 클래식이라고 불리우는 마르세유 타로(TdM)는 1909년에 라이더-웨이트(RWS)덱이 출시되기 이전까지는 표준 타로 덱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장강의 물결을 거스를 수는 없는 법. 개정된 타로라는 명분을 들고 나온 완성도 높은 웨이트 덱의 출시 이후로 다양한 작가에 의해 새로운 타로 덱이 출시되는 현대(모던) 타로의 시대를 열어젖힙니다. 자연스레 마르세유 덱에 대한 연구는 점차 줄어들며 하락세를 걷게 되지요.


타로 제작이 학문적 담론에서 디자인이 중심의 문화로 바뀌고, 현대에 출시되는 타로 덱들이 별다른 변주 없이 웨이트 덱의 구조를 그대로 따르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바뀐 점이라곤 그림밖에 없는 사례가 많아진 까닭에 "웨이트 계열"과 같은 웃지 못할 낭설들도 생겨났습니다. 워낙 웨이트 덱의 완성도가 높아서 영향을 받지 않은 덱이 없는 관계로 마치 일종의 표준처럼 자리를 잡은 탓이지요.


이전 칼럼에서 언급했듯 그림이 다른 타로 덱은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으므로 새롭게 공부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웨이트 덱의 영향력이 워낙 크기 때문에 오늘날 출시되는 대다수의 덱들이 웨이트 덱과 어느 정도의 유사성을 가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처음부터 유사한 의미가 되도록 상징을 구성하는 경우가 많기도 하고요. 때문에 웨이트 덱을 공부하면 같거나 비슷한 구조를 가진 다른 덱을 볼 때에도 이해에 상당한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초보자에게 웨이트 덱을 권하는 것입니다.


※ 웨이트 덱의 의미를 그대로 적용하면 된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닙니다.

 

◎ 오래 보아야 예쁘다.



덱의 완성도가 높다는 말은 근거가 탄탄하다는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A. E. 웨이트는 충실했습니다. 자신이 타로를 개정한 이유를 상세하게 설명한 논문을 출판하여 근거를 제시했습니다. 사실 웨이트 뿐 아니라 고전 시대의 타로 연구자들은 으레 하는 일이었고, 그 시대에는 타로 연구가 학문의 영역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선구자 역할을 한 웨이트 덱은 고전 명작이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훌륭한 작품입니다. 처음 그림만 보고 드는 인상만으로 판단하면 그저 옛날 그림을 가진 오래된 덱일 뿐이지만, 깊게 파고들수록 치밀한 설계와 이론에 감탄하게 됩니다. 거기에 더해 빛나는 재능을 가졌던 파멜라 콜먼 스미스 선생의 그림도 보면 볼수록 매력이 느껴집니다. 마치 처음 먹었을 때는 밍밍해서 무슨 맛인지 몰라도 자꾸 먹고 싶고, 먹을수록 빠져드는 평양냉면처럼 말입니다.

 

◎ 장인은 도구를 탓하지 않는다.



웨이트 덱이 오래되고 신비주의 철학적 주제를 다룬다는 이유로 자기만의 덱을 구상하겠다는 포부를 밝히는 오늘날의 자칭 연구자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개 예쁘고 귀여운 캐릭터를 주제로 그림을 바꾼다거나, 문자로 만든 기호를 체계로 사용하는 등의 시도가 대부분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공부하고 사용하면서 손에 익은 도구를 굳이 바꿀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뛰어난 완성도를 가진 덱을 멋대로 개정하면서 열정을 낭비할 당위성이 없는 까닭입니다. 훌륭한 완성도를 지닌 다른 덱들도 있으나, 새로운 덱을 다시 공부할 시간에 현재 가진 도구를 더 완벽하게 쓰도록 연습하는 방향이 더 효율적이기도 하고요.


기호나 문자를 통한 자신만의 상징 체계를 사용한 점을 개발하려는 시도 역시 공감하기 힘듭니다. 웨이트가 말했듯 기호나 문자(언어)만으로는 점술 용도로 사용하기에 충분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단순히 타로라는 물건 자체가 좋아서 수집을 하는 거라면 취향의 영역이지만, 상담을 할 때마다 덱을 바꿔대는 멀티 덱 유저를 볼 때 색안경을 끼게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 사람은 설마 이 모든 덱을 다 공부했을까?"라는 의문이 자연스레 따라오는 까닭입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보면 "그냥 웨이트 의미로 읽는다"라는 답이 대부분이었으며, 따로 공부를 한다고 해도 깊은 수준까지 연구를 한 경우는 적었습니다. 사실 한 가지 덱만 파도 부족한 시간에 수십 가지 종류의 덱을 깊게 공부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도 한계가 있습니다.


저 역시 좀비 타로의 사례처럼 제 관심사가 주제인 타로 덱을 보면 끌려서 구입하기도 합니다. 기존에 갖고 있던 지식으로 쉽게 상징을 해독했지만, 만약 제가 웨이트 덱을 깊게 공부하지 않았다면 이처럼 쉽게 분석할 수는 없었겠다는 생각이 들어 오히려 웨이트 덱에 대한 애정만 깊어졌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동안 투자한 돈과 쌓은 공부가 아까워서라도 다른 덱을 사용하는 일은 꺼려지기도 합니다. 저도 여느 초보자와 다르지 않게 그림에 아쉬움을 가졌던 때가 있었기에 예쁜 테마 덱을 찾는 심정을 십분 이해합니다. 그럼에도 제 경험에 비춰 웨이트를 권하는 이유를 한 번쯤 풀어보고 싶었기에 작성한 글입니다. 입문자 여러분의 길에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Comments


은자학회 본부 -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팔용로 493 남산빌딩 지하

Email(내무원) scholaeremitae@gmail.com

©2022 by Schola Eremitae All rights reserved

bottom of page